흑백아날로그 프린트를 고집하는 민병헌.
그가 찍는 풍경은 일상의 자연이지만
그의 사진속 해석된 풍경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다른 세상이다.
한미사진미술관은 사진의 특성과 미학 성찰을 넘어 인간, 제도, 문명, 이데올로기, 환경, 역사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현대사진의 다양성을 보여준 1990년대 사진가들 중추로서 그들의 현주소를 조명하는 전시를 기획, 진행하고 있다.
지난 2018년 8월 박기호사진전, 김중만사진전에 이어 오는 2월 23일부터 5월 18일까지 민병헌의 《이끼》를 소개한다.
민병헌사진전 《이끼》는 정통 아날로그 사진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사진가 민병헌의 신작이다.
1987년 《별거 아닌 풍경》에서부터 사진가가 어떻게 대상을 보는지,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를 분명히 제시하며 완벽한 프린트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 왔다. 그의 사진은 중립적인 빛에 집중하였었고 길가에 밟히는 작은 풀, 거친 땅과 같은 풍경을 발표하면서 사진의 소재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트렸고 같은 대상을 어떻게 다르게 보는가에 집중하였다. 그 삶의 터전에서 누적된 경험과 시간이 내면에 켜켜이 쌓여 작품으로 발현된다. 그렇게 민병헌이 발붙이고 사는 땅과 더불어 “그다움”을 만들어 갔다.
이번 전시에서는 민병헌의 특허라고 볼 수 있던 아련한 중간톤은 없다. 민병헌은 혼자서 천천히 걸으며 눈에 들어오는 빛과 바람을 수집한다. 군산으로 터전을 옮기면서 예전과 다른 강한 톤, 다양한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빛을 찾아 헤매고 땅의 숨소리에 이끌려 보이지 않는 빛과 시간의 흔적의 끝에서 마주한 깊고 음습한 지역. 그 마주한 원초적인 생명 군생하는 이끼의 모습을 소름 돋을 만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끼는 육상생활을 시작한 최초의 식물군이다. 보통 식물의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대지에 바짝 붙거나 나무와 돌에 공생한다. 강렬한 태양 빛이 드리우는 그 순간 물기를 품어내면서 보이는 반짝임을 통해 이끼의 모습을 구별할 수 있고 돌과 나무에 기대거나 엎드린 형태로만 그 범위를 추측할 수 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살아있는 끈질김, 물과 빛을 품은 후 발산하는 축축하고 끈적한 불편한 존재감 그리고 이끼를 키워내는 음습한 곳의 척박함과 디테일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가끔은 보일 듯 말 듯 형체를 감추고 드러나지 않은 듯 평온하다 싶지만 와글와글 군집한 현상이 섬뜩하기도 하다.
본다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생의 본질이다. 어느 순간 도착한 깊숙한 자연 속에서만 보이는 것, 그리고 눈앞에 있어도 본질을확신할 수 없는 그렇게 매일매일 다르게 보이는 것들을 붙잡을 수 없는, 공허한 아름다움과 빛을 따라 여전히 그는 민병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별거 아닌 것을 특별한 눈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이끼의 침범이라 해둘까, 이끼의 이김이라 해둘까.
-민병헌의 《이끼》전에 부쳐
김민정(시인)
드넓은 땅에 미쳤다가 휜 나무에 미쳤다가 지금은 돌 틈 사이에 낀 이끼에 미친 한 스승을 안다. 왜 하필 이끼인 것이냐고 나는 되묻지 않았다. 이끼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음을 나도 아주 조금 내 이끼란 것에 매일 아침 물을 주며 들여다보는 일로 알게 되었으니까. 뚜렷한 사계절과 상관없이 피고 지는 일에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그냥 거기 언제나 엎드려 있는 듯한 그것. 육상 생활을 시작한 최초의 식물군이라는 정의에 걸맞게 발가벗은 듯하나 돋보기로 보자면 녹색 갑옷을 입고 있는 듯한 그것. 잎과 줄기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고 관다발이 없는 하등下等 식물이라지만 돌려 말하자면 하등何等 뺏길 것이 없었기에 태초로부터 온전히 저 자신을 지킬 수 있던 듯한 그것. 어쨌거나 변화무쌍으로부터 가장 먼 그것. 요지부동인 그것. 한마디로 고집불통인 그것. 그러니까 그 이끼를 말하는 참인데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이끼를 닮았다고는 말 못 하겠고 이끼처럼 사는 한 사람은 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진작가 민병헌 얘기다.
어림짐작으로 그의 앞선 작품들을 되짚자니 《잡초》가 있었고 《안개》가 있었고 《하늘》이 있었고 《눈》이 있었고 《폭포》가 있었고 《누드》가 있었고 《강》이 떠올라 《이끼》 역시 충분히 말이 되는 그만의 초점이라 하겠다. 그는 언제나 원형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중심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이었으니까. 군더더기라는 말에 닭살을 긁고 비유컨대 옷감 끝자락의 레이스 같은 장식을 딱 질색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어쩌면 이끼가 그의 숙명이고 이끼에게 그가 운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색으로 타고난 이끼가 흑백으로 재현되면서 일순 삶이 죽음으로 뒤바뀌는 풍경…… 그는 특유의 제스처로 ‘별거 아닌 풍경’이라 머리를 긁적이겠지만 이끼를 마주한 순간 그의 몸을 뚫고 지나갔을 ‘생生’이라는 정의를 그는 끝끝내 놓치지 못했으리라. 왜냐? 그라는 진정성은 제 눈으로 보고 제 이로 악물 때의 어떤 집요함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그것이기도 하니까. 특히나 그는 머리로의 계산보다 몸으로의 바지런함보다 심장으로의 뜨거움을 제 업보 같은 제 작업의 우선순위로 치니까.
이번 참에 민병헌의 사진으로 탈탈 털리게 된 이끼 자신도 꽤나 놀랐을 것이다. 제 안에 이토록 심연 깊은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을지 까맣게 몰랐을 테니 말이다. 모두가 산 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누구나 죽은 자의 얼굴을 하게 될 우리 가운데 이끼 혼자만이 이 둘을 아는 여유로 제 있고 싶은 곳에 이렇듯 자유로이 퍼져 있다. 이끼의 침범이라 해둘까. 이끼의 이김이라 해둘까. 이끼는 그 시작을 모르고 그 끝을 모른다는 데서 우리의 나고 감과 닮았지만 일평생 자유자재로 몸 바꾸는 우리와 달리 한평생 곧이곧대로 말 바꾸는 우리와 달리 제 ‘있음’의 자리에서 그 ‘있음’으로 바위처럼 바위보다 더한 뚝심으로 스스로의 교교함을 유지할 줄 안다. 민병헌이 얇게 째진 매서운 제 눈을 부라려가며 이끼의 뒤를 밟게 된 데는 다분히 이런 끌림 또한 작용해마지 않았을 것이다.
자란다고 하기보다 번진다고 해야 더 어울릴 법한 이끼의 현현顯現. 이상하지. 민병헌의 이번 사진 속 풍경들은 묘하리만치 인간들을 닮아 있다. 더 정확하게는 인간들의 뼈라 할 수 있겠다. 등뼈 같고 어깨뼈 같고 넓적다리뼈 같고 정강이뼈 같고 얼굴뼈 같고 머리뼈 같은, 살을 다 발리고 난 다음의 뼈들이 우글우글 어느 때는 모여서 어느 때는 외따로이 나뒹구는 것만 같다. 큰 그림은 그러한데, 황폐한 것 같기도 하고 척박한 것 같기도 한데, 또 한참 들여다보고 있자니 삐죽삐죽 솟아 있는 그것이, 덥수룩하게 덮여 있는 그것이, 나를 온기로 덥혀줄 것도 같고 나를 감춤으로 숨겨줄 것만 같은 안도에 들게도 한다. 이끼는 어디에 생길지 예측하기는 힘들어도 한번 생기면 도망갈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뚝심의 상징이기도 해서 아닐는지.
찾고 찾다 이끼에게 가 닿기까지 무수히 괜한 걸음을 했을 민병헌의 두 발. 딛고 디디다 이끼에게 가 닿고는 나름의 만세를 불렀을 민병헌의 두 손. 찍고 찍으며 이끼에게 가 닿다가 말없이 말이 통하는 친구를 만났다는 기쁨에 절로 웃었을 민병헌의 두 눈. 평생 암실에 저를 처박은,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극한 직업에 스스로를 밀어 넣은 독한 작업의 소유자가 그라지만 나는 이제 조금 알 것도 같다.
“난 아무 생각이 없고 아무것도 몰라.”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의 구라를 이제 덜 믿게 된 것도 같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다 알고 했다. 그렇지 않겠는가.
정직하고 순진한 바가 있어 그는 제 몸이 시키는 대로 그저 행했을 뿐이거늘. 예서 정답이 나옴이 그의 팔자 같기도 하거니와 그 몸의 타고남이 곧 예술이라는 덩어리임을 바로 알게도 된다. 고통스러운가. 감내라는 겪어냄만이 유일무이한 답이라는 답을 나 어린 주제에 건방지게도 붙여보는 바이다.
민병헌 사진집 『이끼』
한미사진미술관에서 2019년 2월 선보이는 민병헌 사진전 《이끼 Moss》와 함께 사진집이 발간되었다. 이번 사진집에는 《안개Deep Fog》, 《폭포Waterfall》, 《강River》 시리즈 등 자연에 주목하며 정통 아날로그 사진의 형식을 보여주는 사진가 민병헌의 90여점의 신작을 담고 있다. 강한 콘트라스트로 표현된 물과 빛을 품어내는 오묘한 이끼의 형상을 흑백사진으로 풍부하게 담아냈다. 도록에는 개인전을 앞두고 민병헌과 이준(리움 부관장)이 두 차례 구술대화를 통해 정리, 편집한 인터뷰 글이 실렸으며, 특별히 김민정(시인)의 글을 포함한다.